별에서 온 그대' 장태유 감독의 사극 도전, 화려한 영상미 뒤에 남긴 아쉬움: [홍천기] 정주행 후기

드라마 홍천기 공식포스터

붉은 만월 아래, 한 여인이 붓을 들어 올립니다. 그림 한 장으로 마왕을 봉인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 화면 가득 번지는 붉은빛과 바람에 흩날리는 먹선이 소설을 읽으며 상상했던 장면 그대로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화면 한켠에서 터져 나온 CG가 몰입을 깨뜨렸습니다. 이 드라마를 볼 때 느꼈던 감정의 절반은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감탄과 당혹이 동시에 밀려오는 묘한 경험.

서울 홍대에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고 있는 로빈입니다. 한국 드라마를 정주행한 뒤 솔직한 후기를 남기는 블로그를 쓰고 있는데, 오늘 이야기할 작품은 2021년 SBS 월화 드라마 「홍천기」입니다. 이 작품은 제가 드라마보다 소설을 먼저 접한 몇 안 되는 경우여서, 시작부터 남다른 기대를 안고 봤던 작품이기도 합니다.

소설을 먼저 읽은 시청자의 솔직한 출발점

홍대 근처 독립서점에서 시간을 보내다 정은궐 작가의 소설 「홍천기」를 발견했습니다. 같은 작가의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을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있어서 별 고민 없이 집어 들었고, 상하권을 이틀에 걸쳐 읽었습니다. 소설을 다 읽고 나니 장태유 감독이 이 이야기를 어떻게 영상으로 옮겼는지 궁금해져서 넷플릭스에서 드라마를 틀었습니다.

「홍천기」는 2021년 8월 30일부터 10월 26일까지 SBS 월화 드라마로 방영된 16부작 판타지 로맨스 사극입니다. 「별에서 온 그대」와 「뿌리깊은 나무」를 연출한 장태유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고, 「멜로가 체질」의 하은 작가가 극본을 썼습니다. 김유정이 신령한 힘을 가진 여화공 홍천기 역을, 안효섭이 하늘의 별자리를 읽는 맹인 관상감 관원 하람 역을 맡았으며, 공명과 곽시양이 양명대군과 주향대군으로 출연했습니다. 닐슨코리아 전국 기준 1회 시청률 6.6%로 출발해, 최종회에서 자체 최고인 10.4%를 기록하며 유종의 미를 거뒀습니다.

소설을 먼저 읽은 입장에서 드라마가 가장 크게 달랐던 점은 배경 설정이었습니다. 원작은 조선을 직접 다루는데, 드라마는 역사 왜곡 논란을 피하기 위해 가상의 왕조 '단왕조'로 각색했습니다. 이름과 관직은 바꿨지만 의상이나 배경은 조선과 거의 동일해서, 솔직히 가상 왕조라는 설정이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는 의문이 남았습니다. 하지만 그 덕분에 판타지 요소를 좀 더 자유롭게 풀어낼 수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장태유 감독의 사극 도전: 화려함과 논란 사이

장태유 감독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역시 「별에서 온 그대」입니다. 현대극에서 보여줬던 세련된 영상미와 감각적인 연출이 사극에서는 어떻게 발휘될지, 기대가 컸습니다. 실제로 「바람의 화원」이나 「뿌리깊은 나무」에서 이미 사극 경험이 있는 감독이기도 하니까요.

그런데 「홍천기」에서 가장 논란이 됐던 부분이 바로 CG와 연출이었습니다. 저도 1회를 보면서 느꼈는데, 마왕이 등장하는 장면이나 신령한 기운을 표현하는 시각 효과가 2021년 작품이라기엔 다소 거친 편이었습니다. 여자친구한테 "이거 2021년 맞아?"라고 물었더니, 여자친구는 "내용에 집중해"라며 웃었습니다. 실제로 방영 당시에도 CG 품질에 대한 시청자 반응이 뜨거웠고, 초반부의 혹평이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만, 뒤로 갈수록 연출이 안정을 찾아가는 게 느껴졌습니다. 특히 5회에서 홍천기와 하람이 재회하는 장면의 색감과 조명 연출은 사극 판타지라는 장르에 잘 어울렸고, 후반부 봉인식 장면에서는 붉은빛이 화면 전체를 채우는 미장센이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게스트하우스 라운지에서 이 장면을 보고 있었는데, 마침 체크아웃을 마치고 돌아온 일본인 게스트가 화면을 힐끗 보더니 "きれい(예쁘다)"라고 한마디 하고 지나간 기억이 납니다. CG 논란에도 불구하고, 순수한 시각적 아름다움만큼은 확실히 눈길을 끄는 작품이었습니다.

김유정과 안효섭: 케미가 서사를 이끈 순간들

이 드라마의 중심축은 결국 김유정과 안효섭의 케미였습니다. 김유정은 천방지축 에너지와 결기 있는 여화공을 동시에 보여줘야 하는 어려운 역할이었는데, 그 전환이 자연스러웠습니다. 특히 아버지 홍은오가 세상을 떠난 뒤 괴로워하면서도 하람을 구하기 위해 붓을 드는 장면에서는, 어린 시절 이미지가 강했던 배우에게서 이런 깊이가 나올 수 있구나 싶었습니다.

안효섭은 하람과 마왕이라는 두 인격을 하나의 몸으로 연기해야 했습니다. 눈빛 하나로 하람에서 마왕으로 전환되는 순간, 같은 얼굴인데 전혀 다른 사람이 느껴졌습니다. 소설에서 읽었을 때는 하람이 마왕에게 잠식되는 과정이 글자로만 전달되다 보니 추상적이었는데, 안효섭의 연기를 보니 그 고통이 훨씬 구체적으로 와닿았습니다. KBO 시즌 중 비 오는 평일 저녁에 혼자 넷플릭스를 틀고 봤던 11회, 하람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게 마왕이 깃든 자기 자신이었다는 걸 알게 되는 장면에서는 경기 중계를 켜려던 손이 멈췄습니다.

공명의 양명대군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홍천기를 향한 마음을 품으면서도 결국 왕좌를 향해 걸어가야 하는 인물인데, 이 캐릭터 덕분에 단순한 로맨스 구도에 정치적 긴장감이 더해졌습니다. 여자친구는 "공명이 제일 불쌍하다"며 양명대군 편을 들었고, 저는 "하람이 더 복잡한 인물"이라며 의견이 갈렸습니다. 같은 드라마를 보면서 누구에게 감정이입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는 작품이었습니다.

마왕 서사의 흡인력과 결말의 아쉬움

「홍천기」의 서사를 지탱하는 두 축은 로맨스와 마왕 봉인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마왕이라는 존재의 설정이 이 작품을 단순한 사극 로맨스와 구별 짓는 핵심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삼신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마왕이 인간의 욕망에 기생한다는 설정, 그리고 그 마왕을 그림 한 장으로 봉인한다는 발상은 소설에서 읽었을 때도 독특하다고 느꼈는데, 영상으로 보니 더 강렬했습니다.

1
로맨스와 마왕 봉인: 잘 마무리된 축

하람과 홍천기의 사랑 이야기는 마왕 봉인과 맞물려 깔끔하게 수렴했습니다. 홍천기가 목숨을 걸고 그린 어용화로 마왕을 봉인하고, 5년 뒤 시력을 되찾은 홍천기가 하람과 가정을 꾸리는 결말은 충분히 보람 있었습니다. 소설의 결말과 큰 틀에서 같았기에, 원작 팬으로서도 수긍할 수 있는 마무리였습니다.

2
왕위 분쟁: 회수되지 못한 서사

반면 주향대군과 양명대군의 왕위 분쟁은 끝까지 풀리지 않았습니다. 주향대군이 반역을 일으키는 장면을 마지막에 배치해 놓고 열린 결말로 처리한 것은, 16회 안에 모든 이야기를 담기엔 서사의 폭이 너무 넓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중반부까지 왕위 분쟁에 상당한 분량을 할애했는데 결론을 내지 못한 건 분명 아쉬운 점이었습니다.

3
소설과 드라마 사이: 각색의 득과 실

소설에서는 왕위 분쟁과 마왕 봉인이 비교적 균형 있게 마무리되는 반면, 드라마는 로맨스에 무게를 더 실으면서 정치 서사가 밀려난 느낌이었습니다. 판타지 로맨스라는 장르적 선택이 초반 시청률 상승에는 기여했지만, 이야기의 완결성 면에서는 대가를 치른 셈입니다.

그럼에도 끝까지 본 이유, 그리고 남은 여운

솔직히 말하면 CG에 대한 불만과 후반부 서사의 허술함이 분명 있었음에도, 저는 이 드라마를 중간에 끊지 않았습니다. 이유를 생각해 보면, 결국 김유정과 안효섭이 만들어낸 감정선 때문이었습니다. 마왕에게 잠식되어 가는 하람을 지키기 위해 홍천기가 보여주는 결기, 그리고 자신 안의 괴물과 싸우면서도 사랑하는 사람 곁에 머물려는 하람의 모습은, CG가 어떻든 간에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습니다.

웹툰을 즐겨 보는 입장에서 이 작품의 세계관이 웹툰적이라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삼신, 마왕, 봉인, 신령한 그림이라는 설정은 요즘 네이버 웹툰에서 자주 보는 한국형 판타지와 맥이 닿아 있어서, 드라마라기보다 움직이는 웹툰을 보는 기분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장르적 호불호가 갈릴 수밖에 없는 작품이지만, 한국 사극 판타지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한 번쯤 도전해 볼 가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종회를 보고 나서 여자친구한테 감상을 물었더니, "로맨스는 좋았는데 곽시양이 아까웠다"라고 했습니다. 저도 비슷한 생각이었습니다. 주향대군이라는 캐릭터가 단순한 악역이 아니라 나름의 명분을 가진 인물이었는데, 그 이야기가 제대로 마무리되지 못한 채 끝난 건 배우에게도 아쉬운 일이었을 겁니다. 넷플릭스와 웨이브에서 시청 가능하니, 관심 있는 분은 1~2화를 먼저 보시고 CG가 감당 가능한 수준인지 판단하신 뒤 이어 보시는 걸 권합니다.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다 보면, 문제가 생겼을 때 완벽하게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최선을 다해 손님을 맞이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홍천기도 그런 작품이었습니다. CG라는 기술적 한계를 안고 있었지만, 배우들의 열연과 소설 원작의 단단한 이야기 뼈대가 그 빈자리를 채웠습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진심이 느껴지는 작품에 마음이 가는 건, 드라마나 일상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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